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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스타 정복하기

한국인과 일본인의 다방 문화

by 쏭주부 2025. 1. 6.

◆ 일본인에 의한 다방 문화

다방(茶房)이라고 하면 커피를 연상하게 되고 그래서 다방도 외래 문물로 생각하기 쉬우나 다방은 우리 역사에서 오래 전부터 쓰였던 단어이다. 다방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려 시대에는 그 전부터 내려오던 '차 문화'가 더욱 성행하여 차(茶)'는 각종 의식에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많은 '다인(茶人)'과 '다시(茶詩)'가 나온 것도 이 시기이며, '다방'이란 기록이 나타난 것도 이때이다. 곧 '다방'은 고려조 종종 때의 관청으로서 '다사(茶事)'와 '주과(酒菓)' 등을 관장했다고 전해온다. 그 구체적인 활동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나 궁중의 연회 의식에서 접객을 맞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의 '다방'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다례(茶禮)'라는 이름으로 외국 사신들의 접대를 맡는 국가 기관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이처럼 관청의 기구로 시작된 '다방'이 개화기에 접어들어 지금과 같은 성격의 다방으로 자리잡아 갈 무렵, 서울 시내의 다방은 명동과 충무로, 소공동 일대를 중심으로 몰려있었고, 종로 일대에 한두 군데 있었을 뿐,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드나드는 손님들도 지체 높은 관료층이거나 개화된 멋쟁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과는 아직 거리가 먼 곳이었다.

 또한, 지금의 '신도 호텔' 옆에 있었던 '명치제과{明治製菓)'에서도 커피를 팔았는데, 친구 서넛이 1원을 가지고 가면 몇 시간이나 우쭐거리며 지낼 수 있을 만큼 특별 계층의 전유물이었따. 또 몇 해 뒤에 '명치제과' 맞은편에 라이벌로 등장하게 된 '금강산(金剛山)' 이라는 제과점에서도 커피를 팔았는데, 나중에는 경양식까지도 곁들여 영업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중국대사관이 있는 명동 입구 옛 코스모스 백화점 옆 골목길에는 '허리우드'라는 다방이 있었다. 이곳은 원래 구한말에 원세개(袁世凱)가 [ ‘위안스카이’를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 중국 군대를 끌고 와 주둔해 있던 곳이어서 중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이들 가운데 동순태(同順泰)라는 한 갑부가 있었는데, 한때는 '시대일보'의 사무실로 쓰이기도 했던 동순태의 집에 일본 사람에 의해 허리우드 다방이 문을 열게 되었다.

 '허리우드'는 6.25전쟁 때 황명희라는 여자가 북에서 내려오는 문화인들을 대상으로 계속 문을 열고 영업을 하기도 하였다.

동순태(同順泰)

선 고종 25년(1888) 무렵부터 인천을 중심으로 번창한 중국 청나라 사람의 상사(商社). 
상업ㆍ무역ㆍ차관(借款) 대여ㆍ선박 회사 업무 따위를 하였으나, 청일 전쟁을 계기로 쇠퇴하였다.

 

 

 

◆ 한국인에 의한 다방 문화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문을 연 다방으로는 1927년 '카카듀'라는 곳이 처음이었으며, 주인인 이경손으로 '아리랑'의 나운규를 길러낸 조선 최초의 본격적인 영화평론가로 꼽힌다. 이어 1929년에는 YMCA 근처에 '멕시코' 다방이 문을 열었는데, 양주까지 팔았으나 수익을 목적으로 한 경영이 아니라 예술인들에게 모임 장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컸기 때문에 문을 닫을 당시 외상 전표가 상자에 가득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멕시코' 다방에 이어 극작가 유치진이 '브라다나스'라는 다방을 소공동에 차렸는데, 이곳은 당시 유명한 문화인들의 모이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영화배우 복혜숙이 인사동 부근에 '비너스'라는 다방을 차려 인기를 독차지한 것도 이 무렵이었으며, 서울시청 앞의 '낙랑(浪)'과 [한사군() 가운데 청천강 이남 황해도 자비령 이북 일대에 있던 행정 구역] 러시아풍 다방인 명동의 '트로이카' 역시 이즈음에 문을 열었다.

박서련 저  · 안온북스 출판
영화 '밀정'의 카카듀
이경손

음악다방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삼일독립운동 이후로 일본이 제국주의의 야망을 펴기 시작한 1920년대 후반이었다. 초기의 다방 가운데 특히 음악다방으로 관심을 불러 모았던곳은 명동의 '에리자' 다방이었으며, 이곳은 음악평론가로 활약하던 김관이 주인이었고 젊은 예술인들에게는 이색적인 꿈과 낭만의 전당이었다.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은 특이한 실내 장식으로 '제비'와 '69'를 개업하여 화제가 되었으며, 소공동의 '미모사'는 프랑스 스타일의 커피와 샹송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충무로의 '원'은 독일 스타일로, '돌체'는 고전 음악 전문으로 음악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인 이상 (일제강점기 「오감도」, 「이런 시」, 「거울」 등을 저술한 시인. 소설가)

 

◆ 태평양 전쟁 시기의 다방 문화

시인 이상(李箱)이 한참 자신의 재기를 위해 동부서주 할 무렵에 종로 거리에는 '멕시코' 다방과 '낙랑' 다방도 있었지만 그나마 적자를 면하기 시작한 다방은 '동랑파라'뿐이었다. 지상광고(告)[신문의 지면] 를 실시하여 대담하고도 기발한 방법으로 손님을 유치하는데 성공한 후에 영화배우였던 김연실이 1940년대까지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 직전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종전이 될 때까지 다방은 전시 상황이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커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1940년 당시 동경 시내에만 해도 다방이 3,000여 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도 전쟁 막바지에는 폐점이나 전업 할 수 밖에 없었다. 커피 수입 통로가 막히게 되자 커피 애호가들은 고구마 또는 백합근(合根), 대두(大豆) 등을 볶은 뒤 사카린을 넣어 만든 즙을 마심으로써 간신히 욕구를 달래는 정도였다. 이처럼 커피 품귀 현상은 식민지 치하인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다방들도 공습과 '소까이(피난)'라는 전쟁의 중압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 8.15 해방 시기의 다방 문화

해방과 함께 서울 명동 언저리에 있었던 다방들이 먼저 하나둘씩 문을 열어 해방의 감격은 다방가에서부터 흘러넘쳐났다. 그 가운데에서도 선두 주자로 나섰던 '봉선화'에서는 다시 옛 정취가 되살아났다. 벽면 한쪽에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과 리스트의 헝가리 무곡 등을 힘차게 들려주어 부흥을 위한 새로운 기운을 찾으려는 공간으로 한몫을 다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위도식하는 한량들이나 실업자들이 모이는 곳이 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목가적 다방을 차리거나 이러한 다방에 드나들면서 이 땅의 예술을 꽃 피우기 시작하였다.

'봉선화'에 이어 '에덴'이란 고전 음악다방과 '마돈나'가 새로 생겨났는데, 해방과 함께 친미적이고 서구적인 이름들이 다방 이름에도 쓰이기 시작했다.

 

◆ 6.25 동란 시기의 다방 문화

한국은 1950년 이전까지는 비록 적은 양이지만 원두커피를 주로 마셨는데 아직은 대중 속으로 확산되기 이전이었다.

'모나리자' 다방은 6.25 이전부터 서울 수복 후 까지 명동을 찾아오는 문인 예술가들의 고향 같은 느낌을 주었으며, 다방 정면에는 모나리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방 마담은 항상 웃음 띈 얼굴로 분위기를 훈훈하게 해주었고 조용한 음악이 6.25의 아픔을 달래주었다. 그러나 마담이 다방을 그만두고 시집을 가게 되자 단골손님들은 모나리자도 시집을 가는구나... 하면서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의 회오리에 뒤덮여 공산군 치하의 서울 생활 90여 일을 보낸 9월 28일 서울이 다시 회복되자 '돌체' 다방이 옛 제일 백화점 부근에서 먼저 오픈하여 명동 거리를 커피와 음악으로 시작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부산과 대구로 피난하게 되었다. 부산 피난 생활은 흔히 '밀다원 시대'로 불릴 만큼 '밀다원'은 피난 지식인들의 집합소였다. '밀다원' 다방은 광복동 네거리에서 시청 쪽으로 위차한 2층 건물의 위층에 있었다.

6.25 전쟁이 휴전이 되고 폐허가 되어버린 명동으로 피난 갔던 올림피아, 금붕어, 돌체등의 다방들이 속속 다시 문을 열면서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1950년의 6.25 사변은 커피의 대중화를 본격적으로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는데, 미군이 마시던 인스턴트 커피가 국내로 들어오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커피의 대중화 시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