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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스타 정복하기

세계 커피 문화 역사 [2]

by 쏭주부 2025. 1. 1.

◆ 현대의 커피 문화

 

19세기 중엽, 로마에서 운영된 커피하우스에 괴테(Goethe), 바그너(Wagner), 고골리(Gogoli), 멘델스존(Mendelssohn) 같은 예술가 또는 학자들이 즐겨 찾았다고 하는 기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현대의 커피문화는 만개하는 예술과 그리고 산업의 발달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 사례를 살펴보면 산업혁명으로 일찍이 공업사회를 이룩한 영국은 물론 프랑스, 미국 들은 세계 각처에 식민지를 거느리며 커피 재배에도 성공을 거둬 바야흐로 커피가 국제 교역상품 중에서도 중요한 무역상품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특히, 현대 커피문화의 대중을 이루고 있는 인스턴트커피는 1865년 미국 남북전쟁 말경 게일(Gale)이라는 사람이 정부로부터 커피의 조리개량 방법 이라는 특허권을 획득하면서 유래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대에서 대량으로 소비되면서 인스턴트 커피(Instant Coffee)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기호식품이면서 소비성 상품인 커피는 현대인의 입맛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종종 커피 전쟁을 방불케 하는 무역상들의 횡포가 나타나는가 하면, 다른 경제 동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커피 수출입국 간의 커피 쟁탈전을 예방하고 커피 교역에 따른 유통 체계의 질서를 도모하기 위해 1962년에 커피 기구 (ICO : Internarional Coffee Organization)가 창립되었다.

국제 커피 기구(영어: International Coffee Organization, ICO)는 세계의 커피 생산과 무역을 담당하는 국제기구이다. 1962년 유엔과 체결한 국제 커피 협정(International Coffee Agreement)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설립된 시기는 
1963년이다. 본부는 영국 런던에 있다.

 

런던에 본부를 둔 이 기구는 커피의 공정거래, 생산과 소비의 균형 유지,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불이익을 주지 않는 커피 가격 안정 등의 업무 활동을 하며 가입국가는 커피 수출국가 70개국 중 전체 커피생산의 97%를 차지하고 있는 45개국 소비국 32개국이 포함 77개국이다. 그러나 회원국의 커피 소비를 진흥시키고 원산지의 증명제도를 관리하며 비회원국의 수출입을 제한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는 국제 커피 기구이지만 커피의 수요공급이 균형을 이룰 때만 제구실을 할 뿐, 원산지의 예기치 못한 작황 불황이나 거센 반발이 일어날 때면 속수무책이 되어 세계의 커피 애호가들을 속태우게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ICO 회원국은 아니다. ICO 회원국은 생산국과 소비국으로 나누어지는데 과거 우리나라의 커피 소비량은 ‘커피소비국’으로 분류될 만큼 그 양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가 신생 커피 소비국으로 부상하고 있어 회원가입이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특권층에 의해 향유되던 커피가 이제 일반대중의 기호식품으로 자리한 지금, 한 잔의 커피는 친구, 연인, 그리고 비즈니스맨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필수적인 음료로 각광받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한 잔의 커피가 있는 공간 그곳은 어쩌면 현대인의 영원한 휴식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맥스웰하우스 인스턴트커피
국제커피기구 (ICO)

 

 

◆ 한국의 커피 문화

* 고종황제가 처음 접한 커피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으로 들어온 시기는 대략 1890년대로 추정된다. 이는 에티오피아의 염소 치기가 커피를 처음 발견한 때에서부터 1300년쯤이 지난 뒤의 일이며,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이웃 일본에 커피가 상륙한 지 170년쯤이 지난 뒤의 일이다.

 커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로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믿을만한 유래로는 1895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 고종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이른바 아관파천 때에 러시가 공사 웨베르(Kart Ivanovich Waeber)가 고종과 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커피를 권했다는 설이다.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며 우리나라 사람으로 커피를 처음 마신 사람 역시 고종으로 나타나 있으므로 이 이야기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렇게 하여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 맛을 들인 고종은 환궁 후에도 덕수궁에 정관헌( 靜觀軒)이라는 서양식 집을 짓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곤 하였다. 특히, 웨베르는 한 술 더 떠서 미인계까지 끌어들여 손탁(Antoinette Sontag)이라는 독일 여인으로 하여금 고종의 커피 시중을 들게 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첫선을 보인 커피는 매우 정치적인 색채가 강하였다.

덕수궁 정관헌

고종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커피 애호가였다. 그 무렵 웨베르(K. I. Waeber)의 미인계 전략에 따라 고종의 커피시중을 들던 독일여인 손탁(Songtag)은 옛 이화여고 본관이 들어서 있던 서울 중구 정동 29번지의 왕실 소유 땅 184평을 하사받아 이곳에 2층 양옥을 세우고 손탁호텔(Sontag Hotel)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손탁호텔에는 다방이 하나 있었으며, 다방의 형태를 갖추고 커피를 판 곳으로는 이곳이 최초로 꼽힌다.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러시아어: 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 독일어: Carl Friedrich Theodor von Waeber 카를 프리드리히 테오도어 폰 베버, 문화어: 칼 웨베르, 1841년 6월 17일 ~ 1910년 1월 8일)는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로 근무하였고, 고종의 개인적인 친구이기도 했다.
'위패'(韋貝)라는 한국어 이름이 있으며, 웨베르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독일어: Marie Antoinette Sontag 마리 안토아네트 존타크, 1854년 ~ 1922년)는 대한제국 러시아 제국에서 활약한 독일인 통역사이며, 손탁호텔의 지배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어 이름은 손탁(孫澤)이다.

 

정치적 사건과 함께 이 땅에 등장한 커피는 곧이어 1898년 한차례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고종이 만수절(萬壽, 칠순 잔치)에 덕수궁에서 태자인 순조와 함께 커피를 마시려는 순간 냄새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채고 마시지 않았으나, 이미 마셔버린 태자는 거품을 토하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조선조 말기의 역관(譯官)이었던 김홍륙이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가로챈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로 귀향을 가게 되자, 아내를 시켜 임금을 독살하려 했던 이른바 '김홍륙 독살 사건'이었다. 

한국 최초의 사진엽서  알레베크 사진엽서 에 등장한 김홍륙 (왼쪽에서 두번째 인물)

함경도에서 태어났다. 천민 출신이었으나 블라디보스토크를 내왕하며 러시아어를 익혀 역관으로 특채되었다. 1894년부터 이듬해 사이에 이범진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조약을 체결할 때 조선 유일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서 활약하였다. 1895년에는 임최수·안경수 등과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비서원승으로 있으면서 고종과 러시아공사 베베르 사이에 통역을 맡아보았다.
그 뒤 고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면서 권세를 함부로 행사하고, 뇌물을 탈취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윤용선 내각에서 학부협판으로 승진되고, 1898년 친러파의 몰락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고종의 총애와 러시아의 세력을 배경으로 온갖 전횡을 자행하는 한편, 궁궐을 무상출입하고 독립협회를 헐뜯었다. 동년 8월,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서 전라남도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떠나기 직전에 원한을 품고 고종이 즐겨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어 살해하려고 한 독살사건이 발각되자,
반역죄로 참수되었다.

 

순종은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긴 했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이 사건을 통하여 고종은 커피의 향을 그 자리에서 식별할 만큼 대단한 애호가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