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커피 문화
* 서양의 '양탕국' 커피
러시아를 통해 커피가 들어온 것과 함께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경로도 중요한 한 갈래이다. 한일합방 이후로 조선에 몰려오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그들의 찻집양식인 깃사텐(일본어: 喫茶店 (きっさてん) 킷사텐, 찻집)을 서울 명동의 진고개에 옮겨놓고 커피영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방문화의 대중화는 아직까지 시기상조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접목이 그리 쉽사리 이루어질 일도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유 한 잔에 생과자를 덧붙여 예쁘장한 여자 아이가 날라다주곤 하던 이르반 '가나루 미루쿠 호루'라는 밀크 홀이 동경 시내 대학가 주변에는 많았는데, 대지진 이후 밀크 홀이 없어지고 1925년부터 '깃사텐'이라는 찻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끽다점(일본어: 喫茶店きっさてん 킷사텐)이란 원래 찻집, 다방이라는 뜻이다. 다만 일본에서 끽다점이라고 하면 카페 등과는 구분되는, 쇼와시대에 그 문화적 원형을 두는 특유의 휴게음식점을 말한다. 차나 커피와 함께 각종 디저트, 가벼운 경양식을 제공한다.
일본에서 카페(カフェ)라고 하면 서양풍이고, 다관(茶館)이라고 하면 중국풍이다. 일본 전근대 전통의 것은 차야(茶屋)라고 한다. 끽다점이라고 하면 이러한 것들과는 구분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역시 개화 초기, 예로부터 서울로 들어오는 북쪽 관문 구실을 한 무악재도 커피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땔감나무 가게를 차려놓고 장사하던 '부래산' 이라는 프랑스인이 우리나라 나무장수와 상구너 경쟁을 벌이면서 나뭇단을 썼다고 한다. 떨떨하면서도 구수하여 입안에 확 풍기는 야릇한 향기를 맛 본 나무꾼들은 이 '시커멓고 요상한 국물'을 서양의 탕국이라하여 '양탕(洋湯)국' 이라고 불렀는데, 이 양탕국이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에게 알려진 최초의 커피인 셈이다.
1903년 10월 28일 설립된 기독교청년회(YMCA)도 커피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청년회관은 서양 문물 도입의 창구 역활을 하던 곳으로 이곳을 통해 농구, 축구, 배구 등 서양의 운동 경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김규식, 김정식, 신흥우, 구자옥 등 사회적으로 저명한 개화파 인물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도 커피의 향기가 거리로 흘러 나오고 있었는데, 윤치호의 집에서 일하던 요리사가 이 건물 안의 식당 옆 조그마한 방에서 케이크와 간단한 경양식을 비롯하여 커피를 팔기 시작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학교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스낵 코너 같은 가게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다방으로는 개항 전후 인천에 세워진 '대불호텔(大佛hotel)'과 '슈트우드 호텔'에도 부속 다방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내용은 확실하지 않다. 서울에서는 1926년 문을 연 '나카무라(中村)' 다방이 근대식 다방의 시초로 추정되는데, 일본인 나카무라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여 지금의 충무로 사보이호텔 동편 쪽에서 운영했다.
대불호텔(大佛hotel) 또는 다이부쓰 호텔(일본어: 大仏ホテル다이부쓰 호테루)은 인천에 있던 호텔이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1888년에 지어졌다. 현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불호텔은 1884년에 2층 규모의 일본식 목조 건물이었다. 그러나 외국인 고객을 맞기에 시설이 부족해 1888년에 3층 규모의 서양식 건물로 재건되었다.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가 이를 운영하였다.
1899년 경인선 개통 이후 숙박업이 쇠퇴하자, 호텔은 1907년에 문을 닫았다. 1918년에 뢰소정(賴紹晶) 등 중국인들이 호텔을 인수해 북경요리 전문점 중화루(中華樓)를 열었다. 중화루는 1970년대 초까지 운영되었으며, 1978년에 철거될 때까지 월세집으로 사용되었다.
* 일본인에 의한 다방문화
다방(茶房)이라고 하면 커피를 연상하게 되고 그래서 다방도 외래 문물로 생각하기 쉬우나 다방은 우리 역사에서 오래 전부터 쓰였던 단어이다. 다방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려 시대에는 그 전부터 내려오던 '차 문화'가 더욱 성행하여 '차(茶)'는 각종 의식에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많은 '다인(茶人)'과 '다시(茶時)'와 '주과(酒果)' 등을 관장했다고 전해온다. 그 구체적인 활동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나 궁중의 연회 의식에서 접객을 맞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의 '다방'은 조선시대꺼지 이어져 '다례(茶禮)'라는 이름으로 외국 사신들의 접대를 맡는 국가 기관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이처럼 관청의 기구로 시작된 '다방'이 개화기에 접어들며 지금과 같은 성격의 다방으로 자리잡아갈 무렵, 서울 시내의 다방은 명동과 충무로, 소공동 일대를 중심으로 몰려있었고, 종로 일대에 한 두 군데 있었을 뿐,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드나드는 손님들도 자체 높은 관료층이거나 개화된 멋쟁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과는 아직 거리가 먼 곳이었다.
또한, 지금의 '신도호텔' 옆에 있었던 '명치제과'에서도 커피를 팔았는데, 친구 서넛이 1원을 가지고 가면 몇 시간이나 우쭐거리며 지낼 수 있을 만큼 특별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또 몇 해 뒤에 '명치제과' 맞은편에 라이벌로 등장하게 된 '금강산(金剛山)' 이라는 제과점에서도 커피를 팔았는데, 나중에는 경양식까지도 곁들여 영업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중국대사관이 있는 명동 입구 옛 코스모스 백화점 옆 골목길에는 '허리우드'라는 다방이 있었다. 이곳은 원래 구한말에 원세개(袁世凱)가 중국 군대를 끌고 와 주둔해 있던 곳이어서 중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이들 가운데 동순태(同順泰)라는 한 갑부가 있었는데, 한때는 '시대일보'의 사무실로 쓰이기도 했던 동순태의 집에 일본 사람에 의해 허리우드 다방이 문을 열게 되었다.
'허리우드'는 6.25전쟁 때 황명희라는 여자가 북에서 내려오는 문화인들을 대상으로 계속 문을 열고 영업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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