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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스타 정복하기

커피지도사가 알려주는 커피 이론 정복하기 [세계의 커피 하우스 4]

by 쏭주부 2024. 12. 27.

11) 프랑스의 커피하우스

프랑스의 카페는 그 번창속도가 영국의 커피하우스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는데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686년 파리에 카페 프로코프(Procopio dei Colteli)에 의해 문을 열었다. 프랑스에 커피하우스를 보급하는데 공헌한 루이 14세(Louis ⅩⅣ, 1643~1715)는 1669년 터키 대사인 슐레이만 아가(Suleiman Aga)가 프랑스 궁정에서 부임의식을 가지면서 동방의 많은 물건들 외에 많은 양의 커피 생두를 가져왔다.

슐레이만 아가는 프랑스 궁정의 권력층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음료가 커피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에게 커피를 대접하기 시작하여 이때부터 파리에 카페가 급속도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의 파리 사람들은 커피는 남자의 생식능력을 약화시키고 심한 질병과 무력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의사들의 경고로 커피를 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1664년 커피를 처음 마셔 본 후 1670년경에는 해마다 네덜란드에서 왕실 전용 커피를 수입토록 하였다.

루이 14세 초상화

루이 14세(프랑스어: Louis XIV, 1638년 9월 5일~1715년 9월 1일)는 프랑스의 왕이자 나바라의 군주이다. 본명은 
루이 디외도네(프랑스어: Louis-Dieudonné)이고, 공식 칭호는 루이 드 프랑스-나바르(프랑스어: Louis de France et de Navarre)다. 그는 다섯 살 생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다. 실질적인 통치는 재상 마자랭이 1661년까지 대신하였다. 그는 유럽의 군주 중 최장기 집권자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치세기간은 섭정과 친정 기간을 모두 합하여 72년 3개월 18일이다.

 

르 프로코프(Le Procope)

1686년 이탈리아 출신 프란체스코 프로코피오 데이 콜텔리(Francesco Procopie dei Coltelli, 그러나 이후 그는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식인 프랑수와 프로코프 꾸또로 개명하였다)가 문을 연 세계 최초의 카페-레스토랑 ‘르 프로코프’는 본격적으로 프랑스의 카페 문화의 시작을 알렸다. 파리 6구 라틴지구에 위치한 르 프로코프는 유명한 지식인들이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며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유를 비롯해 극작가 보마르셰, 풍자적 우화로 유명한 시인 라 퐁텐과 서정적 시인 베를렌느, 그리고 너무나도 유명한 오노레 드 발자크와 빅토르 위고가 자주 출몰하였다. 18세기의 르 프로코프는 자유주의 사상을 지지하는 자들의 활동 구역으로도 떠올랐다. 르 프로코프는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등 프랑스 대혁명의 주요인물들이 새로운 세상을 위해 정치적 견해를 나누던 곳이었고 미국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만드는 데 기여한 벤자민 프랭클린도 방문했던 곳이다. 카페의 내부는 17세기와 18세기의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데 나폴레옹의 모자도 있다. 르 프로코프의 단골손님이었던 나폴레옹이 커피값이 없어 모자를 대신 맡기고 간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2) 독일의 커피하우스

독일에서는 18세기 초까지 일반가정에서 아침식사로 밀가루로 만든 스프와 맥주를 먹었으나 그 이후에 부유한 가정에서는 점차 '모닝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 카페가 먼저 자리 잡았던 도시는 도서출판업으로 유명한 '라이프치히(Leipzig)' [  라이프치히는 독일 동부 지역에 있는 작센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중앙 마르크트플라츠 광장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된 구 시청 건물은 시립 역사박물관으로 시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보여주고 있다 ] 로서 이곳은 상업이 발달하여 생활이 여유로웠고, 문화생활도 활발하였다.

라이프치히 최초의 카페는 궁정 초콜릿 제조자였던 요란 레만이 1694년에 문을 연 '아라비아의 커피나무' 카페였다. 라이프치히의 초기 카페들은 도박과 천박한 행동으로 인해 평판이 좋지 않았으나 당국의 엄격한 감시로 부정적인 시각이 사라지면서 점차 시대를 앞서가는 멋쟁이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로 북적거렸다. 커피에 매료된 시인들은 카페에 자신의 시(詩)를 받치기도 하였는데, 괴테(Goethe)는 대학에 다니던 젊은 시절 드나들던 '헨델의 카페'를 위한 노래를 지었다.

 18세기 독일의 시에 관한 교본에는 시적 상상력의 포에스틱(poetics)로서 커피와 카페의 창조적인 분위기에 젖어볼 것을 권장하였다. 당시 라이프치히에 머물던 음악가들 역시 카페를 자주 이용했는데, 슈만(Schuman)바그너(Wagner), '커피 칸타타(Coffee Cantata)'를 작곡한 바흐(Bach)를 빼놓을 수 없다. '커피칸타타'의 내용은 "오! 커피 맛은 얼마나 달콤한가! 천 번의 키스보다 사랑스럽고 백포도주보다 훨씬 달콤하도다! 나는 커피를 마셔야만 한다." 등으로 커피를 극찬하였다.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바흐 동상. 사진=위키백과

베토벤은 “60알의 원두는 60가지 음악의 영감을 준다”는 말과 함께 매일 아침 원두 개수를 세면서 커피를 내렸다고 한다. 실제로 원두 60알은 약 9g에 해당하는데, 오늘날의 에스프레소 한 잔의 양과 같다.
아침에 커피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한 잔의 커피에 담긴 60알의 원두는 내게 60개의 아이디어를 가르쳐준다.” 루트비히 반 베토벤은 이렇게 말하면서 매일 의식을 치르듯이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고 한다. 커피 한 잔은 예술가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작은 사치품이었다. 가난한 바흐에게,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에게, 외로운 브람스에게 커피는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 당시 커피는 남자들에게 고뇌를 잊게 하고 갖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비약(飛躍: 나는 듯이 높이 뛰어오름)처럼 여겨졌지만 여성들에게는 불임의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수도 베를린에서는 카페가 1711년에 개정되었는데 보수적인 프로이센 궁정은 술과 커피를 파는  '카페'가 열리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프리드리히1세는 베를린 최초의 카페영업권을 프랑스에서는 이주해온 '올리비아(Olivia)'라는 흑인남자에게 허가 해 주어 올리비아는 '카페 르와이얄'으로 영업을 시작하였고 주로 높은 직위의 군인과 관리들이 많이 찾았다. 베를린의 카페에는 프리드리히 대왕도 미녀들과 함께 나타나 커피를 즐기긴 했으나 '커피금지령'을 선포하였다. 커피에 부과된 과도한 세금 때문에 일수 등 불법이 성행하자 '커피 볶는 일'을 국가산업으로 정하고 퇴여군인들이나 전쟁 부상병들을 감시인으로 동원하였다. 감시인들은 도시 뿐만 아니라 시골 구석구석까지 커피 볶는 기구 수색에 나선 결과 커피매출은 점차 감소하고 커피 값도 절반으로 떨어졌으며 세입도 줄어들자 제도는 폐지되었다.

 18세기 독일에서는 커피가 불법은 아니었지만 커피를 마시는 행위를 비애국적이라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독일 당국은 커피에 간접세, 통상세, 벌금형 등 법을 철저하게 적용하고, 커피를 대신할 국내산 대용품 보급에 힘썼다.

 대용품으로는 완두콩, 볶은 보리, 말린 인삼, 치커리 등이 등장하고, 커피와 가장 비슷한 맛을 내는 치커리(chicory)를 독일의 고유산업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대용품도 커피의 수요를 감소시키는데는 역부족이었고, 갖가지 논란 속에서도 18세기 중엽을 넘기며 커피 음용은 널리 확산되어 갔다.

치커리(chicory)

 

 

독일에서는 1689년 무렵 커피하우스가 생거나기 시작하여 1721년 베를린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으며, 1900년대 독일에서는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며 '카페 크라스(오후의 커피)'가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