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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스타 정복하기

일본과 한국, 최초의 커피 하우스

by 쏭주부 2024. 12. 28.

◆ 일본의 커피하우스

 

동양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78년 경으로 일본에 들어온 커피묘목이 처음이며, 일본에 커피가 처음으로 수입된 것은 1877년이다. 그 후 1888년에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일본 최초의 커피숍은 테이 에이케이(鄭永慶, 1858-1894) 도쿄 우에노 [ Ueno , (상야) ] (일본 도쿄도[] 다이토구[]의 우에노역[]을 중심으로 하는 번화가) 시쿠로몬초(西黒門町)에 개업한  ' 가히사칸(可否茶館) '개점하였다는게 정설이다.

당시에는 당구대 등 오락도구를 구비한 사교장으로, 17세기 후반, 파리에 출현한 카페가 모델이었다고 한다. 이후, 커피숍은 시민의 휴식 장소로서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되어 지금은 세계 40여개국으로부터 38만톤이나 되는 커피원두를 수입하는 세계 3위의 커피 수입국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 커피숍의특징은 시대의 변천과 함께 생활 문화나 취미를 반영하며 발전한 다양성에 있다.

 일본의 많은 커피숍에서는 커피, 홍차, 주스 등의 음료수 뿐만 아니라, 토스트나 샌드위치등 간단한 식사메뉴를 갖추고 있다. 오전 중에는 토스트, 달걀, 샐러드 등을 세트로 한 '모닝세트', 낮에는 식사와 음료수를 세트로 한 '런치세트'를 싼 가격으로 제공하는 가게도 많다.

대부분의 커피숍에서는 커피가 주력상품인 것은 틀림없지만, 특히 커피의 맛을 추구하고 있는 곳이 '커피전문점'이다. 커피원두의 종류, 볶는 방법에서 끓이는 방법, 커피잔에까지 신경을 쓰는 한편, 킬리만자로(Kilimanjaro)나 모카(Mocha)를 그대로 끓이거나 가게마다 각기 다른 배합과 분량으로 블렌딩하여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고루 갖추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홍차나 중국차 전문점도 늘고 있다. 

그 밖에도 다양한 특색을 갖춘 커피숍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클래식, 재즈, 락 등 특정분야의 음악만을 틀어 주는 '음악커피숍'이다. 이곳은 레코드나 오디오 설비가 고가(高價: 비싼 가격. 또는 값이 비싼 것였던 시대에 음악 애호가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면서 좋아하는 음악에 잠겨 감상할 수 있는 장소였다.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도쿄 시부야(Shibuya)에 있는 '명곡 커피전문점 라이온 카페'는 거의 50년전의 모습 그대로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정면의 큰 스피커 옆에는, 클래식 음악 레코드 약 5,000장, CD 약 1,000장이 갖추어져 있고, 손님의 신청곡을 틀어주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즐겨 찾던 팬이나 휴식시간을 이용한 샐러리맨 등 다양하다.

(출처: www.yomiuri.co.jp)

 

 

◆ 한국의 커피하우스

1896년 아관파천(遷)으로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그 곳에 머물 때 러시아 공관 웨베르(Kart Ivanovich Waeber)를 통해 커피를 대접받으므로 우리나라 최초로 커피를 마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고종은 정관헌( 靜觀軒)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커피를 즐겼으며, 당시 커피를 서양에서 들어 온 국물이라고 하여 '양탕국'이라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미인계 전략에 의해 고종의 커피 시중을 들던 웨베르의 처형인 독일계 여인 손탁(Antoinette Songtag)이 정동 러시아 공사관 앞의 왕실 소유의 땅 184평을 하사받아 2층 양옥의 손탁호텔을 지어 커피숍을 꾸며 커피를 판매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하우스로 알려져 있다. 이때를 시작으로 개화기와 일제시대에는 명동과 충무로, 소공동, 종로 등에 커피점이 생겨났으며, 당시의 일본식 다방은 일부 고위층만이 드나들었다. 커피의 대충화는 6.25 전쟁 시기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인스턴트 커피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그 당시 미군으로부터 유출된 인스턴트 커피는 카페인이 너무 많이 함유되어 있어 과음을 하게 되면 불면증에 걸려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였다고 한다. 1970년 동서식품에서 국내 최초로 인스턴트 커피를 생산함으로써 커피가격을 낮추었으나 1990년에 접어들면서 인스턴트 커피의 인기가 내려가면서 원두커피 소비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1999년 7월 스타벅스가 서울 이대점을 시작으로 국내에 새로운 커피문화를 정착함으로써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인스턴트 커피의 소비가 기형적으로 높은 나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친러 세력에 의하여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 일본 세력에 대한 친러 세력의 반발로 일어난 사건으로, 이로 말미암아 친일 내각이 붕괴되었으며 각종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아(俄)'는 당시 러시아의 중국식 표현인 '아라사(俄羅斯)'의 머리글자이고, '관(館)'은 '공사관(公使館)'의 관
을 뜻한다. '파천(播遷)'이라는 단어는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이르던 말이다. 즉, 아관 파천(俄館播遷)이란 임금이 아라사 공사관으로 피신했다는 뜻이다. 일본식 음차인 '노서아(露西亞)'의 앞머리를 따서 노관 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아관 파천(俄館播遷)'이란 용어는 국왕에 대한 일본의 노골적인 폄하의 뜻이 담겼고 '아관 망명(俄館亡命)'이 올바른 용어라는 시각이 있다. 당시 외국에선 대부분 '망명(asylum)'이라고 표현했고, 고종실록에는 '이어(移御)'나 '이필주어(移蹕駐御)' '이차(移次)'라고 기록했다. 실제로 고종은 한양 도성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파천이 아니고 외국 대사관 또는 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사례를 망명이라 하기 때문에 뜻으로도 정확하다. 일본 공사관과 일본인이 설립한 한성신보, 그리고 친일파들만이 '파천'이라고 불렀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황태연 동국대 교수,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회장/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아관 망명이 올바른 용어라고 보고 있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고종 ❘ 高宗


조선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휘는 형(㷗), 자는 성림(聖臨)이다. 정식 시호는 고종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고종 태황제,고종황제,광무황제,광무제등으로 줄여 부른다. 연호는 개국(開國), 건양(建陽), 광무(光武).절일은 만수성절(萬壽聖節).

 

정관헌

 

정관헌 야경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손탁호텔의 설립자 손탁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각종 언어에 능통했던 손탁은 한국어도 빠른 속도로 습득하면서 명성황후의 신뢰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궁궐에서 양식 조리와 외빈을 접대하는 임무를 수여받았다. 당시 조선은 위안스카이에게 한창 내정간섭을 당하고 있었기에 고종과 명성황후는 손탁에게 궁내부와 러시아공사관 사이를 접선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손탁은 '한러밀약‘으로 대표되는 반청운동을 주도하는 등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냈고, 이를 기특히 여긴 고종은 1895년(고종 32년)에 한옥 1채를 그에게 선사한다. 이 한옥은 을미사변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조선 정세 속에서 각국 외교관들의 각축장으로 쓰였고, 아관파천과 같은 각종 정치적 책략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손탁 자신도 이런 계획에 깊이 관여했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기에 성공한 고종은 그에게 기존의 한옥
을 방 5개짜리 양옥으로 업그레이드(?)시켜주는 것으로 보답한다. 이 양옥을 손탁이 서구풍으로 인테리어하고 각종 투숙객을 맞이했던 것이 바로 손탁호텔의 출발점이다.

손탁호텔 전경
손탁호텔 베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