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티오피아의 커피 (: 커피의 원산지)
최초로 커피를 마신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그들이 에티오피아에 살았던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다. A.D. 900~1000년경에 기술한 아랍의 의학 백과에서 발견된 번 컴(buncham)이라 알려진 음료는 비록 커피 생두의 의학적인 성질과 품질에 관한 내용이지만 그것이 확실하게 커피인지의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번컴(buncham)은 "위장, 손발, 피부"에 효능이 있으며, 전신에 훌륭한 향기를 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커피의 방향이 땀샘을 통해 아로마를 간직한 채 풍기는 진귀함이 있으며, 욕실이 없고 목욜을 규칙적으로 하지 않던 시절에 물은 희귀한 자원이었기 때문에 커피 향기의 효과는 대단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커피의 기원을 200년간 연구해 온 한 전문가는 커피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시대에도 존재했으며,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생물학이나 고인류학에서 사람 속(Homo Genus) 가운데 현생인류와 같은 종(種)으로 분류되는 생물을 가리키는 학명(學名)
헬렌(Helen)(*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이 스파르타(Sparta)에서 트로이(Troy)(* 튀르키예 서쪽에 있는 고대도시의 유적. ) 로 '놀랄 만한 음료'를 가져와 트로이에서 음용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는 다윗왕(David)이(* 고대 이스라엘의 제2대 왕. 제사 제도를 정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확립하였다.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떨쳤으며, 구약성서 시편의 상당 부분은 다윗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 아비 게일(Abigail)로부터 커피를 선물 받았으며 에서(Esau)와 룻(Ruth)이 그것을 마셨다고 한다.
1454년 아덴(Aden)의(* 아라비아반도 남안(南岸) 예멘에 있는 도시. ) 율법 학자가 에티오피아에 방문하였을 때 그 지역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가 돌아올 때 집으로 커피 열매를 가져왔다. 커피는 그의 통증을 치료할 뿐 아니라 잠들지 않게 하는 효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효능은 이슬람사원의 수도사들에게 빠른 속도로 알려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예멘에서 커피 재배와 음용이 시작되는 시기는 1454년보다 이전이라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해 커피가 주는 활기가 켓트(Qat, Kat)의 최면보다 더 탁월하다고 정부에서 인정하여 이에 따라 커피 재배는 전역으로 확산하였다.
2) 메카의 커피하우스
최초로 카프베 칸네스(Kaveh Kanes)라는 커피하우스가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Mecca)에 오픈하였다. 원래는 종교적인 목적이었지만, 체스, 잡담, 노래, 춤, 음악의 중심으로 빠르게 발전되었다. 메카로부터 그들은 아덴(Aden), 메디안(Median) 그리고 이집트 카이로(Cairo)지역으로 퍼져 갔다.
3) 튀르키예의 커피하우스
셀림 1세(Selim Ⅰ)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 커피는 1517년에 콘스탄티노플(Constansinople)로 전해졌다. 거기서 커피음용의 습관이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530년에는 다마스쿠스(Damascus)와 1532년에는 알레포(Aleppo)에 커피하우스가 설립되었다. 다마스쿠스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하우스는 '장미 카페'와 '구원의 문 카페'이다.
다마스쿠스[ Damascus ] (아랍어: دمشق 디마슈 ['dimaʃq], 프랑스어: Damas 다마스, 문화어: 디마스끄)
시리아의 수도로 시리아의 남서부에 위치한다.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이전부터 아람제국과 앗시리아, 비잔틴 제국의 주요 도시였고, 이슬람이 전파된 이후, 최초의 이슬람 세계 세속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마스쿠스 [Damascu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SNUAC))
콘스탄티노플에 커피하우스는 1554년경 문을 열었으며, 그들은 호화스러운 가구로 순식간에 유명해졌으며, 고객을 사로잡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다. 커피하우스는 사회적, 비즈니스 차원에서 회의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점차 정치적 논쟁과 의견의 장소가 되어 갔다.
4) 유럽으로의 커피전파
A.D. 11세기 무렵 사라센 제국(Saracens)이 분열되기 시작하여 몰락하고, A.D. 14세기 무렵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Osman Turk Empire)이 번성하면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흑해와 발칸반도, 중앙아시아, 이집트, 아라비아반도에 이르는 매우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사라센제국 [ Saracens ]
7세기에서 동쪽은 13세기 중반까지, 서쪽은 15세기 말까지 인도 서부에서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지역을 무대로 흥망한 이슬람 제왕조(諸王朝)의 총칭.
사라센 제국(Saracens)이 분열되고 있을 무렵 유럽인트들은 십자군(crusades)을 조직하여 이슬람 세계로 원정을 보냈다. 이 때 십자군 병사들은 처음으로 이슬람교 지역에서 자유롭게 커피를 향유하게 되지만 유럽에서는 이교도의 음료라 하여 자유롭게 마실 수 없었다. 그러나 십자군원정 이후 르네상스시대로 접어들면서 근대정신에 눈을 뜬 유럽인들은 종교적 교리로 인하여 이교도의 음료로 낙인찍힌 커피에 대해 관대해지게 되었다.
이후 르네상스라는 문예부흥운동으로 근대정신에 눈뜨게 되었고, 종교교리에 묶여있던 커피에 대해서도 커피는 '시인에게 영감을, 음악가에서는 악상을, 철학자에게 진리를, 그리고 정치가에게 평화를 전한다.'고 찬미할 정도였다.
17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기독교들도 마음 놓고 커피를 마실 수 있게 ㄷ히자 1645년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커피하우가 생겼다. 유럽국가의 커피의 시작은 오스만 투르크의 점령으로부터 시작되는데 투르크의 전사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에는 항상 커피를 소지하고 나갔다. 커피는 기운을 복돋아주고 부족한 잠을 이기게 해주는 전쟁터의 필수품이었기 때문에 커피 없는 전쟁은 생각할 수 없었다.
십자군 [ 十字軍 , Crusades , Croisades ]
서유럽 기독교도가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11세기 말부터 13세기 후반에 걸쳐 여덟번이나 일으킨 원정. 서유럽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도전, 침략전쟁인 동시에 비잔틴제국권에 대한 진출이었으며 마침내 동(同) 제국의 멸망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슬람 세력의 재건과 진출을 초래하고 끝났다. 동방이 서구미술에 끼친 영향도 다방면에 깊게 미쳤으며, 서구측도 동방세계에 많은 모뉴멘트를 남겼다. 제1차 십자군(1096~99)의 예루살렘 점령에 의해 라틴계 예루살렘 왕국이 생겨나고, 로렌 백(伯) 고드프루아(Godefroy de Bouillon, 1060~1100), 이어서 그의 동생 보두앵(Baudouin I,재위 1100~18)이 왕이 되었다. 그 주변에 에데사 백(伯)의 영토, 안티오키아 공(公)의 영토, 트리포리 백(伯)의 영토 등이 성립되고 프랑스의 종군제후(從軍諸侯)가 통치했으나 차례로 함락되고, 1187년에는 예루살렘 왕국도 살라딘(Saladin, 1138~93)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나 제3차 십자군에 의해 왕국은 재건되고(수도 아콘, 아라비아 명칭은 앗카), 13세기까지 명맥을 지켰다. 제3차 십자군은 원정 도중 키프로스 섬을 점령하고 그후 이 섬은 베네치아에 이어져 16세기까지 영유되고, 시리아 ∙ 팔레스티나에서 일소(一掃
)된 십자군의 중요 거점이 됐다.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해군과 함께 1204년 비잔틴 제국의 내분을 틈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 고대 이래로 미술의 보고였던 수도를 파괴 ∙ 약탈하고 라틴 제국을 세웠다. 그때 베네치아는 신(新)제국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프랑스 제후는 그리스 본토의 점령에 진출했다. 라틴 제국(帝國)은 그후 1261년, 황제 미카엘 팔레올로고스(Michael Ⅷ Palaeologos, 재위 1259~82)에 의해 멸망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도 점령되며, 비잔틴 제국 최후의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성립되어 그리스 본토도 탈환했다. 십자군의 결과로 나타난 예루살렘 왕국의 건축 ∙ 미술로는 예루살렘 성분묘 기념성당이 1009년 파티마 왕조 제6대 칼리프 알 하킴(Al Hakim)에 의해 파괴되었던 것이 12세기 십자군 점령시대에 프랑스 ∙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복원 확장되고, 3방면으로 제실(祭室)을 설치한 도보랑(徒步廊)을 두른 반원형 슈베의 삼랑식(三廊式) 본전을 더 지었다. 또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강림기념의 바실리카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건립된 본당과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대에 확장된 동쪽 본전이 보존되어 있지만, 그후 본전 옆벽을 중기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로 장식하고, 십자군 점령 후에도 계속해서 모자이크나 프레스코 장식을 하였으며 그 일부는 남아 있다.
성채건축은 서아시아 남부에서 시리아 ∙ 팔레스티나, 아르메니아, 페르시아 만까지 분포되어 있고, 키프로스섬에도 남아있다. 이것들은 성요한 기사단형(騎士團型)과 템플 기사단형으로 대별(大別)된다. 전자는 깍아지른 언덕위에 성곽이 솟아 있고 원탑을 갖춘 이중의 성벽을 두른 것으로 시리아의 크락크 데 슈바리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후자는 비잔틴이나 아랍 성채를 흉내내어 직사각형 천수각(天守閣)과 성벽이 있고 둘레에 수로(水路)를 비치했다. 또 건축에 딸린 조각, 벽화 외에 사본장식도 있고, 성분묘 교회부속인 스크립토륨에는 프랑스나 영국의 화가들이 비잔틴 회화의 영향을 받은 예루살렘 왕국 궁정을 위한 회화를 그렸다. 그중에서도 『여왕 매리잔드의 시편』(대영도서관)의 미니어처는 대표적인 걸작이다. 화가는 ‘바시레우스’라고 서명해서 비잔틴 양식임을 은근히 나타냈으나 영국화가로 추정되며, 서구의 12세기 회화에 비해 비잔틴의 영향을 섭취한 점에서 한 걸음 앞선 예루살렘 화파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중세 초기부터 비잔틴 문화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서구 사회에 있어 십자군 활동은 이슬람 세계 뿐만 아니라 비잔틴 제국의 문물에 직접 접촉하고, 동방 여러 문화의 섭취를 급격히 촉진하게 되었다. 중기 비잔틴 미술의 치밀한 고전주의 영향아래 로마네스크 미술의 원숙을 가져왔으며 새로운 서구 고딕 미술의 탄생을 촉진하게 되었다. 12세기의 서구미술은 호화로운 비잔틴 미술에 현혹되면서도 그것이 지닌 정관적(静觀的) 신비주의는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활력이 넘치는 인간적인 표현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비잔틴 고전주의의 사실성은 로마네스크 미술의 갱신(更新)에 도움을 주었다. 또 동방미술의 기술적 우수성은 서구미술의 기술 ∙ 기교수준을 높이는 데 촉진제 구실을 했다. 건축은 이미 11세기 중엽에 동방으로부터 첨두(尖頭)아치를 배웠으며 리브 볼트를 도입했고 때에 따라 동방의 돔 구축에 자극되어 제1차 십자군 이전에 이들 새 요소를 이용한, 진귀(珍貴)한 대소 건조물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부 프랑스, 영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 요소가 새로운 건축양식을 낳기 위해서는 건조기술의 가일층의 진보와 세련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서구의 지배 계급층이 동방에서 여러가지 진보된 건축기법과 그 건조의 예를 접한 것이 적지 않게 자극이 되었음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십자군시대가 로마네스크 미술의 원숙기였고, 초기고딕 미술의 여러가지 양식이 시도되었으며, 드디어 13세기의 전형적인 고딕 미술의 실현을 보게되는 서구 중세미술의 최성기에 해당되는 것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또 로도스섬과 몰타 섬에는 성 요한 기사단이 십자군의 잔존세력이었던 무렵의 건물이나 시설(로도스는 14~15세기, 몰타는 16세기 전반)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십자군 [十字軍, Crusades, Croisades]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오스만 투르크 전사의 필수품이었던 커피는 유럽인들의 커피 문화에 결정적인 역화을 하였으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기독교 국가를 점령하게 되면 반드시 커피를 전파하였다. (술의 대체제로써 커피를 음용하였다.) 물론 커피의 전래는 이슬람 선교의 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커피가 서서히 기독교 문화권에 전파되기 시작할 즈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 Vienna)에서 유럽 커피 문화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683년 헝가리를 정복한 오스만 투르크의 전사들은 그 여세를 몰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향해 전쟁을 계속하였으나 빈에서 투르크 전사의 승승장구 행진은 발목이 잡혔고 여기에서 대참패를 하게 된다. 빈(Wien)만 함락시키면 유럽 대륙으로의 길이 활짝 열리는 중요한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운명이 그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커피 문화의 전래는 바로 이 전투에서 세계를 향한 정복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대패한 오스만 투르크의 전사들은 엄청난 물량의 군수 물자를 챙기지도 못하고 황망(慌忙 : 마음이 몹시 급하여 당황하고 허둥지둥하는 면이 있음)이 퇴각하게 되는데 이 때 놓고 간 군수물자 중에는 20만 대군이 마실 엄청난 커피가 섞여 있었고 자연히 이 지역에서 사랑받고 퍼져 있던 커피는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퍼져나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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